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추궁했다.
예수님께는
유대 사회에서 인정하는 목자의 자격이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과 권능에 찬 말씀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 수 있는 충분한 증거가 된다.
그러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끝까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교권주의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반문하셨다.
당황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무엇이라 답해야 할지 의논했다.
만일 세례 요한이 하늘에서 권세를 받아 세례를 베풀었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왜 그를 믿지 않느냐고 질책하실 것이며,
나아가 그가 증거한 예수님을 왜 부인하느냐고 책망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세례 요한이 사람에게 권한을 받아 세례를 주었다고 답하기도 곤란했다.
그리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로 여기는 세례 요한의 권위를 무시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가만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곤경에 빠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모른다고 대답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종교 문제를 판단할 능력이 없으며,
나아가 더 이상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음을
스스로 깨닫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주인과 소작농들의 비유를 들어
유대 교권주의자들이 멸망받을 것을 경고하셨다.
이 비유 속의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소작농들은 유대 목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종들은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주인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의 소작농들이
주인이 보낸 종들을 때리고 능욕하고 내어쫓은 것도 모자라,
주인의 상속자인 아들까지 죽인 것은
포도원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주인이 와서 농부들을 진멸하고,
제때 실과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세로 줄 것이라고 했다(마 21:41).
본문 비유는 욕심 많은 유대 목자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예수 그리스도마저 죽일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심판 주로 오셔서
범죄한 목자들을 징벌하실 것을 예언한 말씀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아닌 영적 이스라엘 중에서
교회를 다스릴 목자가 나올 것을 알린 내용이다.
요한계시록이 응하면,
주께 권세를 받고 주 앞에 선 두 증인이 출현하여 역사한다.
그리고 알곡 성도를 추수하기 위해
이 땅의 사명자들은 천사의 낫이 되어 추수꾼 천사와 함께
교회라는 밭으로 보냄을 받는다(계 14:14~16).
그 때 목자들의 반응은 어떻겠는가?
그들이 과연 두 증인을 받아줄 것이며,
추수를 위해 파송된 사람들을 가만두겠는가?
요한계시록 11장 7~8절에는
두 증인이 죽임을 당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본문의 포도원 소작농이 실과를 거둘 때가 되어도
그 소출을 주인에게 바치지 않은 것처럼,
또 초림 때 유대 목자들이 그러했듯이,
그들은 자신이 잠시 맡고 있는 성도들을 자기 소유인 것처럼 여기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목자 앞으로 순순히 내어놓지 않을 것이다.
초림 때를 생각해보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천국 문을 닫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다(마 23:13).
목자들의 태도가 초림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을진대,
예수님께서는 도둑같이 몰래 오셔서 성도들을 추수하신다.
오늘날 이 시대에도 인습과 구습에 젖은 교회들이
진정으로 성경에 예언된 말씀을 두려워한다면,
지금처럼 서로 비난하고 단죄하는 행위가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건축자는
앞에서 베푼 비유 속의 포도원 농부들에 해당하며,
건축자들이 버린 돌은
농부들이 죽인 주인의 아들과 같은 존재이다.
실상을 말하면,
건축자들은 당시 영적 성전을 짓던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며,
건축자들이 버린 돌은 이스라엘 목자들이 죽인 예수님이시다.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은 교회의 머리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바울은
우리 성도가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고 하였다(엡 2:22).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진다면,
실로 예수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머릿돌이 되신다.
예수님이라는 이 돌에 부딪히는 사람은 심판을 면치 못한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그 위에 떨어지는 자는 가루가 된다.
깨어지고 가루가 된다는 것은 파멸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것을 구약 성경에 예언한 대로 이루시고 말씀하셨다.
성도는
자신을 인도하는 목자가
과연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과 예수님의 뜻을 좇고,
성경대로 행하고 있는지 확인하여
바른 길로 가야 한다.
아무리 교권이 크고 학문이 높다 해도
성경을 바르게 깨치지 못한 목자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가 아니다.
또, 아무리 거룩한 표정과 몸짓을 지어도
참 진리의 말씀을 대적하는 사람은
초림 때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과 같이
외식하는 부류에 지나지 않는다.
설령, 목자가 그런다고 하더라도
성도들까지 외식적이고 잘못된 신앙을 따라 해서는 안 된다.
잠든 영혼을 깨우는 것은 성경 말씀이다.
세상이 어지럽고 혼돈할수록 깨어 있어야 한다.
사사건건 예수님과 부딪쳤던 사람들은
하나 같이 그 시대 종교 세계의 실권자들이었던 목자들이다.
율법을 외우고 가르치며 존경받던 그들이
참으로 성경에 무지하지 않고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었다면,
어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마다 시비를 걸었겠는가?
오늘날도 사실상 성경에 가장 무식한 사람들은 목자들이라고 본다.
성도들처럼 아예 자신이 성경을 모른다 생각하고 말씀을 들으면 모르겠으나
저들은 안다고 자부하고 있으니,
자기가 확신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성경의 역사와 교훈에 해박하다고 하여
성경을 통달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성경의 핵심인 예언이 빠진 부분적인 지식일 뿐이다.
실제로 오늘날 교계에는
우리 신천지 성도들보다 무지한 목자들이 더 많다.
해외에서 신학 수료증을 몇 개씩 받아온 신학 박사들도,
대학 강단에 서는 신학 교수들도,
신천지 말씀이 최고의 진리임을 시인하며 자필 확인서를 썼다.
이것은 지금 기성 교회가 얼마나 말씀이 없는지를 증명해주는 좋은 증거물이다.
초림 때를 보아도
유대 사회에서 인정하는 율법 학교를 나온 율법사들보다
예수님께 몇 년 배운 제자들이 성경에 정통했다.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성경을 배웠느냐는 것이다.
이스라엘 목자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한 원인 중 하나는
자기들이 정통이라는 인식과 권세욕 때문이다.
초림 때 잠시 이스라엘에 왔다가 떠나간 영계 하나님의 나라는,
재림 때 니골라당과 싸워 승리한 이긴 자(계 3:12)와
그가 인도하는 12지파에 임한다.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포도원과 농부, 건축자들과 머릿돌에 관한 비유가
자신들을 가리켜 하신 것인 줄 알고
예수님을 잡고자 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백성이 많으므로
얼른 행동에 옮기지는 못했다(눅20:19절).
저희는 예수님을 로마 총독에게 넘기려고
정탐꾼들을 보내어 예수님의 말을 책잡게 하였다.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어떠한 것도 가질 수 없다.
이스라엘을 다스린 로마 왕 가이사의 권세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가 비록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이기는 하나,
그의 권세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식민지 이스라엘 백성은
가이사의 통치에 따라 그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다.
이러한 예수님의 답변은 명쾌했다.
예수님을 없애려는 유대 목자들의 음모가 또 한 차례 실패로 끝났다.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질문했다.
이스라엘 율법에는 수혼(嫂婚)이라는 제도가 있다.
그 규정은 형제 중 누가 죽고 아들이 없으면,
다른 형제가 그 죽은 자의 아내를 자기 부인으로 삼아
그 여자에게 낳은 첫아들로 하여금 죽은 형제의 대를 잇는 것이다(신 25:5~6).
이 제도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하여금 땅의 티끌 같게 하시겠다 말씀하신
하나님의 약속(창 13:16)을 이루기 위한 것이며,
죽은 자의 기업을 보존하여
과부가 이방인과 결혼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두개인들에게
먼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다(마 22:29).’ 고 지적하셨다.
그리고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천사와 같아서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다.’ 고 하셨다.
죽은 자들이 부활하면,
그들이 다시 이 땅에서와 같은 삶을 살지 않는다.
그들은 육체를 가진 인생들처럼 누군가의 배우자가 되어 자손을 낳을 필요성이 없다.
그러므로 수혼을 한 여인이 부활 때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문제는
따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육신은 비록 죽었으나,
그들의 영은 하나님 안에서 여전히 살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부친을 먼저 장사하고 주를 따르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제자에게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마 8:21~22).’ 고 말씀하셨다.
육체는 살아있으나 영이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장례식을 치르게 하라고 한 것을 볼 때,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 모두 다 산 자는 아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는,
육신이 있어도 영이 죽은 사람은 죽은 자일 뿐이며,
육신은 죽어도 영이 산 사람은 살아있는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살고 죽음과 상관없이 영이 살아있는
진정한 산 자들과 함께하신다.
마태복음 22장 41~46절 해설을 참고하기 바란다.
마태복음 23장 1~12절 해설을 읽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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